무의미하지도 사소하지도 않다.

진입사와 손절사 본문

write/투기학개론

진입사와 손절사

엔타이투밀라 2018. 12. 25. 10:32

복지부동(伏地不動)이라는 말이 있다.


원래는 군사 용어로 위급한 전시 상황에 몸을 은폐하고 땅에 납작 엎드려 움직이지 아니 한다는 뜻이지만, 요즘은 무사안일(無事安逸)을 바라고 능동적으로 움직이지 않고 소극적으로 행동하는 모습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네이버 학생백과 참조)



생각해보면 어려서부터 우리는 '모르면 가만히 있어라', '아무것도 안하면 중간은 한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 등 능동적인 행위를 경계하는 말을 듣고 자라온 듯 하다.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을 나오고 괜찮은 직장이나 직업을 가지는게 성공적인 삶이라는 '정답'에 어느정도 공감대가 형성된 사회에서 남들과 다른 튀는 행동을 하면 못하면 바보, 잘해도 시기의 대상이 되기 쉽기 때문이다.


상위 그룹이 되지 못할 바엔 기득권 층의 말을 잘 듣는 것도 아니지만, 크게 어긋나지도 않는 다수의 '평균' 그룹에 잠자코 묻혀 가는 편이 여러모로 득이 되는 경우가 많다.  '도전'을 하지 않고  '처분'을 기다린다면 어느정도의 '관용'도 기대해 볼 수 있다.



이와는 조금 다른 경우지만, 사람이 밤에 혼자 산길을 걷다가 호랑이와 마주치게 되면 공포심에 짓눌려 옴짝달싹도 못하게 된다고 한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호랑이가 배가 불러 그냥 지나갈 수도 있는데, 괜한 자극으로 공격받으면 손해라는 심리가 있지 않을까 싶다. 이 역시 '도전'을 하지 않고 '처분'을 기다릴 테니 '관용'을 기대하는 형국이다.




이렇게 장황한 서두를 늘어놓는 이유는 위 내용이 얼마 전 만난 지인과 나눈 이야기의 주제이기 때문이다. 거의 7~8년을 알고 지낸 사이로 성적이 꽤 괜찮은 전업 투자자인 그는 연락을 받고 사무실을 방문한 내게 자신의 오일 포지션을 대신 청산해 달라는 다소 황당한 부탁을 했다. 이유인 즉, 머리로는 이제라도 손절해야 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데 손실이 너무 크다보니 혹시 반등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때문에 도저히 자기 손으로 청산 버튼을 누르지 못하겠다는 것 이다.   


청산 후 가진 술자리에서 그가 해 준 말이 손실이 눈덩이 처럼 불어나자 마치 호랑이를 만난 것 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그저 시장이 '관용'을 베풀어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다가 이건 도저히 아니다 싶은 마음에 연락했다는 것이다.


노련한 투기꾼인 그가 어쩌다 그처럼 손실이 커지도록 방치했는지를 묻는 내게 그는 자신 정도의 경력과 실력이면 손실을 충분히 다룰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는데, 급작스레 손실이 예상범위를 벗어나게 되자 초보때와 마찬가지로 머리속이 하얘지더라고 답했다. 그래도 '자기'나 되니까 이런 방법을 써서라도 살아남은 거 아니겠냐며 웃었다.


비록 뭉칫돈이 덜컥 잘려나갔지만, 나는 그를 별로 걱정하지는 않는다. 그 와중에서도 물타기는 하지 않았고 다소 기이한 방법이긴 하지만 어찌됐던 시장의 '관대한 처분'을 기다리지 않고 늦게라도 용기를 내어 자신이 주도하는 매매를 했기 때문이다. 나라면 어땠을까를 생각해 보면 별로 자신이 없다. 




또 다른 이야기지만, 지난 토요일 트레이더 모임에서 한  FX마진 투자대행 업체 광고 이야기가 화제가 되었었다. 자기들은 수석딜러, 진입사, 손절사, 기술적분석가, 관전사 이렇게 5명이 한팀을 이뤄 전문적인 시스템으로 운영하기 때문에 안전하다는 광고였는데 나는 처음에 농담인 줄 알고 웃다가 정말 그렇게 광고한다는 말에 더 웃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주말동안 곰곰히 생각해보니 지인과 내가 한 일이 바로 진입사와 손절사 역할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에 한 번 더 웃게 되었다. 




어찌되었던, 아무리 경험많은 트레이더라도 감당할 수 없는 손실을 마주하게 되면 막상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는 걸 다시 한번 느끼게 되었다.  '관용'을 기다리지 말고 용기를 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나 같이 평범한 사람이 호랑이를 만나면 싸울 수 없을게 뻔하다.  그러므로 호랑이가 나올 수 있는 산이 나오면 주막에서 하룻밤을 묵고 안전한 낮에 출발을 해야 한다. 남들보다 조금 더 빨리가 조금 더 벌겠다고 목숨을 걸 수는 없지 않은가.


장사는 내일 하면 된다. 위험한 밤길을 피해 주막에서 하룻밤을 묵는 값, 그것이 트레이딩이라는 장사를 하는 우리들이 웃으면서 내야 하는 목숨값이고 손절이다.




ps. 오일은 내가 손절사 역할을 한 이후로도 300틱이 넘게 하락하였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