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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하다면 이 남자의 삶을 보라

엔타이투밀라 2022. 5. 14. 06:24

1. 모험가의 피를 가진 도망자 수터

1834년. 아메리카 증기선 한 척이 프랑스의 르 아브르 항구를 떠나 뉴욕으로 향했다.  절망한 사람들 중에 한 명인 요한 아우구스트 수터는 스위스 바젤 근교의 뢰넨베르크 태생으로 당시 나이는 서른한 살이었다.  그는 대서양이 서둘러 자신을 유럽 재판소에서 멀리 떼어놓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파산해서 도둑과 어음 위조범으로 몰려버린 그는 아내와 세 아이를 곤경에 내버려 둔 채 파리에서 장만한 돈을 약간 갖고서, 이제 엉터리 신분증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새로운 인생을 개척하려고 하는 중이었다.


7월 7일, 그는 뉴욕에 도착했다.  그는 뉴욕에서 이년간 닥치는 대로 온갖 일을 다했다. 짐꾼, 약재상, 치과의사, 의약품 판매인, 선술집 주인 노릇 등등. 마침내 어느 정도 자리를 잡게 되자 그는 음식점과 여관을 겸하는 숙박집 하나를 경영했다.  그러나 곧 그것을 다시 팔아버리고 시간의 마술을 쫓아 미주리로 갔다. 거기서 농부 인생을 새롭게 시작한 그는 짧은 시간 안에 편안하게 살 만한 재산을 모아놓고 이제는 어느 정도 형편이 좋아졌다. 그의 집에는 항상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다.  그들은 모피상, 사냥꾼, 모험가와 군인들이었는데 서부에서 와서 다시 서부로 가는 무리였다.  

그에게 이 서부라는 말은 점차 이상한 마술같은 울림을 가지게 하였다.  우선 광대한 초원이 있다.  그곳에는 엄청나게 많은 물소 떼들이 있고 며칠 몇 주가 지나도록 사람 한 명 만날 수 없다. 다만 가끔 인디언에게 쫓기는 경우가 있을 뿐이다.  그런 다음에는 올라갈 수 없는 높은 산들이 나오고 그러고 나서 마침내 저 서부가 나온다.  그 땅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누구나 그 전설적인 부를 찬양하는 캘리포니아, 아직 미개척된 땅, 누구나 마음대로 갖고 싶은 만큼 가질 수 있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지만 끝없이 멀고 험해서 가기 힘든 땅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수터는 모험가의 피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한군데 자리 잡고 앉아서 자신의 토지나 지키는 일에는 재미가 없었다.  1837년 어느 날 그는 마침내 자기의 재산을 다 처분한 돈으로 마차와 말과 물소 떼를 장만해서 탐험 준비를 마친 후 인디펜던스 요새를 떠나 미지의 땅으로 향했다.

 
2. 버려진 땅 캘리포니아로 가다

1838년. 장교 두명에 선교사 다섯 명 그리고 여자 세명이 물소 마차를 타고서 무한한 공허를 향해 나아갔다.  그들은 석 달 동안 계속해서 여행했다.  10월 말에 그들은 벤쿠버 요새에 도착했다.  두 명의 장교는 이미 수터의 곁을 떠난 상태였고, 선교사들은 더 이상 가려고 하지 않았다.  세 명의 여자들은 도중에 영양실조로 죽었다. 수터는 혼자였다.  사람들은 그를 벤쿠버에 눌러 앉히려고 그에게 직위도 하나 제안해 보았지만 그 모든 것을 그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서부라는 매력적인 이름이 그의 피를 유혹하고 있었다.  그는 보잘것없는 범선을 타고서 태평양을 가로질러 우선 샌드위치섬으로 갔다가 형언하기 어려운 고초를 겪으며 알래스카 해안을 지나서 버려진 땅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당시의 샌프란시스코는 오늘날의 그 도시가 아니었다.  지진이 일어난 후로 두배나 성장해서 백만 인구의 도시가 된 오늘날의 그 도시가 아니었다.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이름을 따서 그렇게 불리는 보잘것없는 어촌에 불과했다.  그곳은 아직 전혀 알려지지 않은 상태라서 멕시코의 변방으로 남아있던 캘리포니아의 주도 되지 못했다.  당시 캘리포니아 주는 철저히 버려져 농사도 짓지 않고 꽃도 가꾸지 않는 곳으로 신대륙의 남아도는 땅에 불과했다. 그곳은 일꾼들과 사람들은 물론 적절한 에너지도 부족했다.  그런 가운데 폭도들만 설쳐댔다.  어떠한 형태의 권위도 성립되지 않은 상태라 스페인식의 무질서가 더욱 심각하게 판을 치고 있었다.   

수터는 말을 한마리 빌려서 새크라멘토의 비옥한 골짜기로 내려가 보았다.  그는 하루 만에 여기가 단순히 광활한 농장 자리가 아니라 하나의 왕국을 건설하기에 충분한 땅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다음날 그는 곧바로 몬테 레이로 가서 주지사인 알베라도에게 자신을 소개하고 이 땅을 경작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는 주변의 여러 섬들로부터 카나카 사람들을 데리고 왔었다.  그리고 그는 정기적으로 이 부지런히 일 잘하는 유색인들을 데리고 와서 노이-헬버티엔이라는 이름의 이민자 마을을 세울 계획이라고 자청해서 설명했다.  

"좋소. 하고 싶은대로 하구려. 십 년 동안의 특허를 주겠소."  이곳에서는 사업이 빨리빨리 체결되었다.  문명세계로부터 1,000마일이나 떨어진 곳에서 단 한 사람의 에너지는 고향땅에서와는 다른 보상을 받고 있었다.
 

3. 세계 제일의 부자가 되다

1839년. 한 떼의 사람들이 처천히 새크라멘토 해안을 따라 위로 올라갔다. 맨 앞에 말을 타고 총을 둘러멘 수터, 그의 뒤에는 두세 명의 유럽 사람 그리고 짧은 셔츠를 입은 백오십 명의 카나카 사람들, 또 그 뒤로는 식료품, 씨앗, 탄약을 실은 물소마차, 오십 마리의 말, 칠십 마리의 노새, 암소, 양들 그리고 몇 명의 후방부대. 이것이 노이-힐베티엔을 정복하려고 하는 군대 전부였다. 

그들 앞에서 거대한 불의 파도가 밀려갔다.  그들은 숲을 태우기로 했다. 그것은 숲을 개간하는 것보다 손쉬운 방법이었다. 그 거대한 불꽃이 땅 위로 퍼져나가자마자 그들은 나무둥치 위의 연기가 채 가시지도 않았는데 일을 시작했다.  그들은 창고를 만들고, 샘도 파고, 쟁기질도 거의 필요없는 땅에 씨를 뿌리고, 끝도 없는 가축떼를 위해서 우리를 지었다.  점점 이웃의 황폐한 선교 이민촌으로부터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성과는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씨앗은 곧바로 오백 퍼센트의 결실을 맺었다. 창고는 수확물로 터질 지경이었고, 가축떼는 천단위를 헤아리게 되었다. 여러 가지 힘든 일들을 해결하는 한편 번성하는 식민지를 습격하는 원주민들에 대항하기 위해 탐사활동도 벌여야 했다.  그런 와중에 노이-헬베티엔은 열대 우림기후 덕에 엄청난 크기로 발전하였다.  운하가 건설되었고 방앗간이 만들어졌으며 해외 대리점까지 생겼다.  강 위로는 배들이 수없이 오르내렸다. 수터는 벤쿠버와 샌드위치섬에만 농산물을 공급하는 것이 아니라 캘리포니아에 정박하는 모든 범선에도 공급했다.  그는 과일나무도 심었다.  그것은 오늘날 저 유명한 캘리포니아의 과일이 되었다.  여기서는 정말 과일농사가 잘 되었다. 그래서 그는 프랑스와 라인강변에서 포도를 들여왔고 몇 년 뒤엔 포도덩굴이 이 넓은 지역을 온통 뒤덮었다. 그는 자신의 집과 널찍한 농장을 짓고 백팔십일이나 걸리는 멀리 떨어진 파리에서 플레옐 피아노를 가져오게 했다.  또 증기기관 한대를 육십 마리의 물소 힘을 이용해서 뉴욕으로부터 대륙을 가로질러서 실어왔다.  

그는 영국과 프랑스의 가장 큰 은행으로부터 신용을 얻었으며 예금계좌도 여러 개 개설했다.  수터는 불과 마흔 다섯의 나이로 승리의 최고봉에 올라섰다. 그러자 십사 년 전에 한 여자와 세 아이를 이 세상 어딘가에 버려두고 왔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그는 그들에게 편지를 써서 자기 왕국으로 오라고 불렀다. 그는 이제서야 비로소 두 주먹이 가득 찼다고 느꼈다.  그는 노이-헬베티엔의 주인으로서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들 중의 한 명에 속했으며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마침내 아메리카 합중국은 이 버려진 식민지를 멕시코의 손에서 빼앗았다.  이제 모든 것은 더욱 안전하게 되었고 몇 년이 지나자 수터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이 되었다.

  

4. 저주스러운 한 삽

1848년 1월. 갑자기 가구제작하는 목수인 제임스 마샬이 잔뜩 흥분해가지고 수터의 집으로 뛰어들어와 이야기할 게 있다고 말했다.  수터는 놀랐다.  어제 새 제재소를 세우라고 마샬을 콜로라도에 있는 농장으로 보낸 참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가 허락도 없이 돌아와서 흥분으로 몸을 떨면서 자기 앞에 서 있지 않은가.  

그는 수터더러 방으로 가자고 독촉하더니 방문을 잠그고 호주머니에서 노란 알갱이가 몇 알 섞인 모래를 한줌 꺼냈다.  어제 땅을 파다가 이 노란 금속이 자기 눈에 뜨였는 데 아마도 금인 것 같다고 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그의 말에 조소만 보냈다는 것이다.  수터는 심각해져서 알갱이를 집어 들고 이빨로 깨물어 보았다.  금이었다.  그는 다음날로 당장 마샬과 함께 농장으로 올라가 보기로 작정했다.  하지만 이미 목수는 저 무시무시한 황금 열병에 걸린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것은 곧 전 세계를 뒤흔들 열병이었다.  마샬은 폭풍우가 몰아치는데도 밤에 말을 타고 초조하게 그곳으로 먼저 돌아가버렸다.   

다음날 아침 수터 대령은 콜로마에 있었다.  그들은 운하를 막고서 모래를 조사해보았다.  그저 체를 하나 들고 몇번 이리저리 흔들기만 하면 금 알갱이가 검은 그물 위에 남아서 반짝이는 것이었다.  수터는 백인 몇 명을 자기 주위로 불러서 제재소가 완성될 때까지는 침묵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엄숙하고 확고한 태도로 자기 농장으로 돌아왔다.  무시무시한 생각들이 그를 마구 잡아 뒤흔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금이 그렇게 쉽게 손에 잡힌 적은 없었다. 그렇게 그대로 땅에 노출되어있은 적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땅은 수터 자신의 재산이 아닌가. 그는 십 년을 단 하룻밤 사이에 건너뛴 것처럼 여겼다. 그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남자였다.
 

5. 금에 미친 사람들

가장 부유한 남자? 결코 아니다. 
어쩌면 이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한, 가장 비참한, 가장 많이 실망한 남자였다.  팔일 후 비밀은 새어나갔다. 어떤 여자가 어떤 나그네에게 그 이야기를 하면서 그에게 금 알갱이 몇 개를 주었다.  그러고 나서 일어난 일은 역사상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곧 수터의 일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하던 일을 때려치웠다.  철물공은 대장간에서 뛰쳐나오고, 목동들은 가축을 내던지고, 포도 농사꾼은 포도밭을 떠나고 병사는 무기를 집어던지고, 모두들 귀신에 씐 듯 성급하게 체와 손잡이 달린 냄비를 집어 들고서 제재소 자리로 달려왔다.  모래에서 금을 가려내기 위해서였다.  

하룻밤 새 지역 전체가 완전히 버려졌다.  젖소는 아무도 젖을 짜주지 않아서 울부짖으며 쓰러져 죽었고, 물소 떼는 축사를 부수고 나와 곡식이 줄기에 매달린 채 썩어가는 들판을 마구 헤집어놓았고, 치즈 공장은 멈춰 섰고 곡식창고는 무너졌다.  결국 거대한 기업의 거대한 톱니바퀴가 멈춰서 버렸다. 전신기가 황금의 약속을 바다 건너까지 전했다.  사람들은 도시에서 항구에서 이쪽으로 몰려들었다.  뱃사람들은 배를 버리고, 정부 관리들도 자신들의 직책을 버리고서 끝도 없이 기다란 줄을 이루며 동쪽에서, 서쪽에서, 걸어서, 말 타고, 마차 타고 몰려들었다.  

인간 메뚜기떼였다.  금에 미친 사람들이었다.  주먹의 법칙밖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잔인한 떼거리였다.  그리고 자기 권총의 계율밖에는 다른 계율이라곤 모르는 족속들이었다.  그러한 작자들이 번성하던 식민지로 몰려든 것이다.  그들에게 그 모든것은 주인 없는 것이었다.  아무도 이 무법자들에게 대항하여 감히 맞설 수가 없었다. 그들은 수터의 암소들을 죽이고 그의 광도 허물어서 그 자리에 집을 지었다.  또한 그의 경작터를 마구 짓밟고 그의 기계들을 훔쳤다.  

하룻밤 새 수터는 거지처럼 되어버렸다. 그것은 마치 황금손을 가진 미다스 왕이 자기 손으로 만들어내는 황금에 파묻혀 질식한 것과 같았다. 이 유례없는 골드러시는 점점 더 난폭해졌다.  그 소식은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뉴욕에서만 백 척의 배들이 떠났고, 독일, 영국, 프랑스, 스페인 등지에서 1848 ~ 1851년에 걸쳐 엄청나게 많은 모험가들이 떼거리로 건너왔다. 어떤 작자들은 남아메리카의 호온 갑을 돌아서 왔지만 성미 급한 사람들에게는 그것은 너무나 먼 길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파나마의 지협을 지나는 훨씬 더 위험한 길을 선택했다.  물정에 밝은 어떤 회사는 이 지협에다 번개같이 재빠르게 철도를 건설했다.  그 이유는 참을성 없는 자들에게 삼사 주일의 시간을 단축시켜서 남보다 빨리 황금의 장소에 도착하도록 해주기 위해서였다. 이 철도건설에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열병에 걸려 쓰러졌다.  

대륙을 가로질러서 수많은 자들이 대열을 이루어 몰려들어왔다.  다양한 인종의 가지각색의 언어를 쓰는 인간들이 모두 다 몰려와서 수터의 재산을 제땅 파듯이 파헤쳤다. 그러더니 정부의 인장 찍힌 계약에 의해서 그의 것으로 되어있는 샌프란시스코 땅 위에 한 도시가 꿈결 같은 속도로 생겨났다.  그곳에서 낯선 사람들이 금이 묻혀있는 토지를 서로 사고팔았다.  그때부터 그의 왕국인 노이-헬베티엔이라는 이름은 엘도라도, 곧 캘리포니아라는 마법적인 말 뒤로 서서히 사라져 갔다.  

수터는 또 한번 파산을 하고서 마비된 듯이 이 거대한 용의 새끼들을 바라보았다. 처음엔 그도 자기 하인들과 직원들과 함께 금이 묻혀있는 땅을 채굴해보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그를 떠나버렸다. 그래서 그는 금이 출토되는 지역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그러니까 저 강과 빌어먹을 모래와는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산 근처의 자기 농장에 은둔해 버렸다.  그런데 마침 그의 아내가 장성한 세명의 자식들을 데리고 그곳에 도착했다. 그러나 도착하자마자 아내는 여행의 피로로 죽고 말았다. 그래도 세 아들이 그의 곁에 남게 되었다. 그러니까 노동할 수 있는 팔이 여덟은 있는 셈이었다. 수터는 그들과 함께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그는 다시금 세 아들과 함께 환상적일 만큼 비옥한 이 땅을 조용하고 끈질기게 일구었다. 다시 한번 그는 원대한 계획을 품었던 것이다.
 

6. 다시 찾은 땅의 권리

1850년. 캘리포니아는 아메리카 합중국에 편입되었다. 마침내 아메리카 합중국의 엄격한 규율아래서 황금에 씌운 땅에도 질서가 잡히게 되었다.  무정부 상태는 통제되었고 법은 다시 그 권위를 되찾았다.  그렇게 되자 수터는 자기 권리를 주장하며 앞으로 나섰다. 샌프란시스코가 자리 잡은 이 땅은 허가된 권리로 보아 수터의 것이다. 국가는 그가 재산을 도둑질당함으로써 입게 된 손실을 보상해 줄 의무가 있다.  그리고 자기 땅에서 채집된 모든 금에 대해서도 자신의 몫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드디어 수터 이전에 인류가 경험해보지 못한 대규모의 소송이 시작되었다.   

수터는 자기 농장에 들어와 살고있는 1만 7,221가구의 농부를 상대로 소송을 걸고서 그들에게 훔친 토지에서 물러나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캘리포니아 주에게도 자기가 건설한 도로, 운하, 다리, 댐, 방앗간 등을 소유하게 된 대가로 2,200만 달러를 요구했다. 또 합중국에게는 망가진 토지와 채굴된 금에 대한 자기 몫에 대한 손해배상으로 2,500만 달러를 요구했다. 그는 맏아들 에밀을 워싱턴으로 보내 법을 공부시켰다. 소송을 이끌어나가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새로운 농장에서 나오는 그 엄청난 이익금은 오로지 돈이 많이 드는 이 소송의 경비로 사용했다. 그는 사 년 동안 이 소송을 온갖 상급법원으로 끌고 다녔다.  

1855년 3월 15일, 마침내 판결이 내려졌다. 캘리포니아 최고위직 판사였던 고지식한 톰슨 판사가 수터의 그 땅에 대한 완전한 권리를 인정했던 것이다. 이날 수터는 목표에 도달했다. 그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남자였다.
 

7. 이십년간의 거지 생활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남자? 아니다. 천만에 아니었다.
가장 거지처럼, 가장 불행하고 쓴 고통을 맛본 사내였다. 다시금 운명이 그를 향해 치명적인 스트라이크를 날렸다. 이번의 것은 그를 완전히 땅바닥에 때려눕힌 일격이었다.  

샌프란시스코와 전 지역에서 판결 소식을 듣고 폭동이 일어난 것이다. 수만 명의 사람들이 한데 모여들었다. 모두 재산을 위협받게 된 자들이었다. 그들은 다시 거리의 폭도들이 되었다. 언제라도 약탈하기를 좋아하는 천박한 무리였다. 그들은 법원으로 몰려가 불을 지르고, 판사를 때려눕히기 위해서 그를 찾아 돌아다녔다. 또한 무시무시한 떼를 이루어서 수터의 전재산을 약탈하려고 몰려갔다. 그의 맏아들은 폭도들에게 쫓기자 권총 자살을 했다. 둘째 아들은 살해당했고, 셋째 아들은 도망쳤으나 돌아오는 길에 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불의 파도가 노이-헬베티엔을 뒤덮었다. 수터의 농장은 불타버렸고, 포도나무는 짓밟혔으며, 그의 동산, 수집품, 돈 등은 도둑맞았다. 결국 엄청난 재산은 인정머리 없는 분노로 인해 황무지로 변하고 말았다. 수터 자신은 겨우 목숨을 구했다.  

이 일격을 받은 수터는 다시는 일어서지 못했다. 그가 심혈을 바쳐 이룩한 작품은 모두 사라져 버렸고, 아내와 자식들은 죽어버렸으며 그의 정신은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단 하나의 생각만이 이미 빛을 잃은 두뇌에서 어지럽게 빛을 내고 있었다. 권리, 소송에 대한 생각이었다.  

그 후 누더기를 걸친 이 늙고 반은 미쳐버린 남자는 이십오 년간 워싱턴의 법원 근처를 맴돌았다. 모든 법률사무소의 사람들은 더러운 윗도리에 너덜너덜해진 구두를 신고서 자신의 수천억 재산을 요구하는 이 '장군'을 알고 있었다. 그에게서 마지막 남은 연금을 빼앗으려고 그에게 거듭 소송하라고 충동질하는 변호사며, 야바위꾼, 사기꾼 등이 수없이 있었다.  

그 자신은 돈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돈을 미워했다. 돈은 그를 비참하게 만들었으며 세 아들을 빼앗아갔고 삶을 망쳐놓았다. 그는 다만 자신의 권리를 원했을 뿐이고 소송에 미친 편집광 환자의 분노로서 권리를 옹호했던 것이다. 그는 상원과 의회에 손해배상 청구를 했다. 한편 그는 자청해서 도움을 주겠다는 별의별 작자들의 말을 순진하게 다 믿었다. 그러나 그들은 화려하게 소송을 걸면서도 그에게 우스꽝스러운 장군 유니폼을 입혀 이 사무실에서 저 사무실로 이 국회의원에게서 저 국회의원에게로 끌고 다니면서 이 불쌍한 사람을 허수아비로 만들 뿐이었다.  

1860년에서 1880년까지 이십 년 동안이나 그렇게 했다. 이십 년 동안의 구차한 거지 생활이었다. 매일매일 그는 의회 건물에서 빈둥거리면서 모든 관리들의 비웃음을 샀고, 길거리 불량배들의 놀림감이 되었다. 지구상에서 가장 풍요로운 땅이 자기 것인 남자, 그곳에서 이 거대한 나라의 두번째로 중요한 도시가 점점 번창해가고 있건만.  

1880년 6월 17일 의회건물 계단에서 그는 심장발작을 일으켰다. 그에게는 구원인 셈이었다. 사람들은 거지나 다름없는 죽은 그를 치웠다. 비록 그의 처지가 죽은 거지와 다름없었으나 호주머니에는 항의문서를 가지고 있었다. 그 문서는 그와 그의 후계자에 게 지상의 권리에 따라서 세계 역사상 최고의 재산을 보장해주는 문서였다.  

지금까지 아무도 수터의 후계자라고 나선 사람은 없다. 그 어떤 후손도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았다. 여전히 샌프란시스코와 그 주 전체는 남의 땅 위에 서있다. 이 지역에서 그 권리에 대해 거론된 적이 없다.

 

 

 

 

 

** 오래 전, 어느 책에서 본 글인데 제목이 기억나질 않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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